거조암[팔공산 ; 경북 영천]
1. 일자 : 2009년 6월 28일
2. 장소 : 거조암
3. 누구와 : 우리가족
4. 개 요 :
지눌 스님께서 고려중기 송광사에 수선사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정혜(定慧)를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불교문화사에 길이 빛날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 >을 발표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 거조암이다. 석가여래가 열반에 드신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이 세상의 불법을 수호하도록 수기받은 분들을 가리키며 응공(應供) 또는 응진(應眞)으로 번역된다.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도사가 이 절을 창건했다고도 전하고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뒤 진평왕 13년 혜림법사(慧林法師)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나한을 모시고 제대성중 기도도량, 영험있는 나한기도도량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은 고려시대 이전의 것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지금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로는 13세기 초에 건립된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1308), 이곳 거조암 영산전(1375), 부석사 조사당(1377) 등 4곳 건물들 뿐이라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가르침이 교(敎)가 되고 도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禪)'이라는 선교일원론(禪敎一元論)을 통해 한국불교사상에 큰 획을 그으셨던 것이다.
큰스님은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를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있다고 하셨다. 이 결사운동은 정법불교(正法佛敎)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의 시국선언문과도 같아서 많은 스님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불교역사의 생동하는 호흡과 정혜(定慧)의 향기 가득한 도량 거조암은 유수한 세월 동안 구도와 참구의 향촉을 밝히는 으뜸의 도량으로 새로운 불교사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오백나한은 5백명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尊者) 즉, 성인의 무리로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석가모니 멸도 후 1차 결집시에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백여 명의 제대성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불교가 극도로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 표현의 자연스런 표출로 나한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커져 있었으며, 이 나한상의 조각형태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승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500여 분의 나한이란 많은 부류의 사람을, 다양한 공부(참구)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누구나 성중님들과 같은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그래서 모든이는 불성을 담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 마음에 새겨야할 것은 스님은 선방이나 아니면 나름의 참구방법으로, 재가자는 사회 직능별 각 분야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도(道)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나한정신일 것이다.
5. 사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