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여행/2012 산행 & 여행

120715 지리산둘레길(금계-동강)

만사형통 33 2012. 7. 17. 01:00

 1. 산행일자 : 2012. 7. 15.(일요일)

 2. 산행코스 & 시간
     금계마을 - 서암정사 - 벽송사 - 벽송사 능선 - 송대마을 - 견불사 - 모전마을 - 세동(송전)마을 - 동강마을-원기마을

   산행시간 : 10시00분 →15시50분(총 5시50분간: 중식,휴식 & 사진촬영시간포함)

 3.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 읍면 80여 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으로 연결하고 있음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 - 지리산둘레길은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길입니다. 한 땀 한 땀 수 놓듯 이어가는 지리산둘레길을 통해 만나는 사람,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모든 생명들의 속삼임을 귀 기울여 들어 보세요

  3-1) 금계 ~ 동강 

 거리 : 15.2km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와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잇는 11km의 지리산길. 이 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히 들어온 6개의 산중 마을과 사찰을 지나 엄천강을 만나는 길이다.
 금계동강 구간은 사찰로 가는 고즈넉한 숲길과 등구재와 법화산 자락을 조망하며 엄천강을 따라 걷는 임도 등으로 구성된다.
유의사항
벽송사~ 소나무쉼터까지의 구간은 단체이용객들의 무분별한 농작물 채취 등, 주민피해가 빈번한 관계로 '미개통'구간이니 통행하실 수 없습니다.
 4. 산행인원 : 나홀로 - 가원

 5. 산행지도 

 

  6. 산행사진

 

 금계마을

노듸목이라고 하는 금계(金鷄)마을은 지금의 의탄교가 가설되기 전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냇물을건너다니는 징검다리 노듸의 목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6.25한국전쟁 이전에는 초가집 몇 채밖에 없었다고 한다. 의평마을에 거주하던 이종식씨가 정감록에 있는 금계동이 금대산밑 현재의 금계마을이라고 단정하고 바위에다 금계동이라고 새겨놓았다고 한다.
한때는 이곳이 지리산 피난지 였다고 전한다 지리산 공비 소탕시 추성리와 의탄리 주민 전체를 이 금계마을로 소개시킨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암정사 주차장

 

  서암정사(석불법당)

한국불교 禪宗의 법승을 계승한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고찰인 벽송사로부터 서쪽으로 600여m 지점에 위치하여 천연의 암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이다.
한국전란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벽송사를 다시 재건한 원응스님이 이 도량을 찾아 장구한 발원을 세우고 지리산의 장엄한 산세를 배경으로 수려한 자연자원과 조화롭게 자연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하고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그린 조각법당을 10여년간에 걸쳐 완성하여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과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찰 입구에 불교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대방광문이 있고 바위에 조각된 사천 왕상을 지나 도량안으로 들어서면 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극락세계를 형상화한 석굴법당이 있고, 도량 위편에는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 광명운대, 그리고 스님들의 수행장소인 사자굴등이 있다.
이는 모두 자연의 암반에다 굴을 파고 조각을 하므로써 불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계곡중 아름답고 웅장하기로 유명하여 3대 계곡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칠선계곡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연중 많은 신도 및 문화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추성리

 

벽송사 입구 

 

벽송사 나무장승-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예전에는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였으나 현재는 벽송사 경내에 정려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벽송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신라말경에 창건된후 조선 중종 경진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碧松 智嚴大師)가 중창,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전에 한국선맥을 이어온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벽송지엄(碧松智嚴), 부용영관 뿐만 아니라 환성지안(喚醒志安), 서룡상민(瑞龍祥玟)등 조선 선맥을 빛낸 8분의 조사가 이 벽송사에서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써 한국선(禪)과 벽송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숙종30년(1704)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되었다가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중건하였고, 철종 원년(1850)에 서룡당 상민(瑞龍堂祥玟)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때 다시 소실되어 1960년 원응 구한(元應 久閒)스님이 쓰러진 가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鐘樓)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또한 경내에는 보물제474호인 『벽송사3층석탑』과 민속자료 제2호인 『벽송사 목장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벽송당지엄영정(碧松堂智嚴影幀), 경암집책판(鏡巖集冊版), 묘법연화경책판(妙法連華經冊版)등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사찰은 1950년대 전란(戰亂)시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도인송

 벽송사 전경

                         미인송

 

 

 

 벽송사3층석탑

벽송사에 있는 조선 초기의 3층석탑. 보물 제474호. 높이 350㎝.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드물게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은 지복석(地覆石) 위에 높은 지대석(地臺石)을 마련한 뒤 기단을 올려놓았다. 중석(中石)의 하단에는 1단의 얕은 턱이 있고, 우주(隅柱)와 1개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다. 갑석(甲石)은 중석 하단의 턱 너비와 같으며, 윗면은 경사가 져 있고 1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에도 우주와 1개의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는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 옥신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의 1·2층은 4단이고, 3층은 3단이며 합각부분에 심한 반전이 보인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송대마을 산행길

 

 

 

 

 

 

 

 

 

 

 송대마을

 

 

 견불사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송전(松田) 마을에 자리한 천년와불성지 지리산 견불사(주지 보덕)는 국립공원인 지리산 하봉 서북쪽 기슭 해발 650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선녀굴이 있고 그 위로 솟아 오른 노장대는 병풍처럼 둘러 북쪽의 문필봉과 어우러져 있으며,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은 벽송사와 서암의 성지를 만들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문수사를 품고, 맞은편 법화산은 삼봉산과 함께 우뚝 솟아 견불사를 감싸 안은 형상이다.
 1300년 전 신라 때 부터 명산으로 이름나 사. 암 사적지를 만들어 불교성지로써 손색이 없는 위치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용유담- 용이 놀다간 곳

마천과 휴천면 경계인 휴천면송전리에 속하는데, 용유담계곡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우뢰와도 같은 폭포소리, 평수면에서의 너른 수면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파라다이스
에 온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엄청강 특유의 돌솥처럼 생긴 반석들은 그 모양이 자연이 빚어놓은 예술품처럼 보인다.

 

 

 

  세동마을

세동이라고 불리우는 송전(松田)마을은 전국적으로 창호지 생산으로 유명한 곳인데 연중 행사처럼 제지공장을 운영하였다. 어디를 가나 딱밭으로 이름난 이 마을은 시대변화에 따라 펄프로 만드는 양지에 밀려 한지가 설 자리를 잃고 딱밭은 칡덩굴로 덮이고 말았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내면서 특히 윗당산제는 별도로 술 한잔을 더 부어 올렸는데 높은 당산제, 윗당산제, 아랫당산제 등 세곳에서 지내면서 특히 윗당산제는 별도로 술한잔을 더 부어 올렸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인재를 구하려 다니다가 이곳 세동 윗당산 정자나무 밑에 쉬어갔는데 그가 뒤주 속에 갇혀서 죽게 되자 애석하게 여겨 그를 추모하는 행사라 한다. 그러나 6·25사변 후 소개령에 의해 마을을 떠나면서 당산제는 사라졌다.
옛부터 세동에는 평산신씨가 토박이로 살아왔다. 효자 신영언의 정려가 있다. 옛날엔 일신재(日新齋)라는 서당이 있었고 송은대, 광암대, 위암대, 심원대 등 루정대가 있다.
이 마을 뒷편에 있는 문수사는 원래 엄천사 산하에 있던 암자였다. 엄천가사 없어진 후 큰 삼존불은 밀양 표충사에서 모셔가고 다른 불상은 문수사 법당에 모시게 되었다. 6·25사변때 문수사가 소실되고 지금은 다시 중건하여 대웅전 문수전 종각 등이 복원되었다.

 

 

 

 

 

 

 

 다리건너 오늘 종점 : 원기마을

 원기마을

조선 숙종때 국가 시책의 하나로 역원법(驛院法)이 있었는데 인근에 역이 없는 이곳 원기(院基)에다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고 나라의 긴급사항을 전달하거나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심부름꾼(史臣)들의 숙식 시설인 다락집을 지어 광혜원이라 하였다.
이때 이 마을을 광혜원의 원자와 광혜원이 있었던 터라하여 터기자를 합해서 원기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전한다. 원기마을 뒷산에는 남호리 공동묘지가 있다.

  동강마을

동강리는 원래 엄천면에 속해 있던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휴천면에 편입되었는데 평촌(坪村), 점촌(店村), 기암(機岩)등 3개마을로 구성되었다.
조선 고종때는 엄천면이라 하여 평촌이 면소재지로 공무와 지방행정을 수행하던 곳이다
경치가 아름다워 냇물의 북쪽인 언덕에는 큰 바위들이 높이 솟아 올라 높은 집들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점촌은 옛날 토기와 철기를 만들어 내던 곳으로써 지금도 점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동강마을에는 신틀바위 전설과 선바위 전설이 있는 곳이다
마을 남쪽 산이 험준하여 곰이 골짜기로 떨어져 죽었다는 곰골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느 새미자골, 작은 차돌이 많아 사람이 다니기 어렵다는 차독배기 골짜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