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여행/2012 산행 & 여행

121223 모악산 & 금산사

만사형통 33 2012. 12. 23. 19:53

1.산행일자 : 2012. 12. 23(일요일)

2.산행코스 :  구이주차장(10:50)~대원사(11:22)~수왕사(12:04)~무제봉(12:28)

                 ~모악산 정상(중식 12:56~13:18)~남봉(13:31)~장근재(13:57)

                 ~배재(14:20)~금산사(15:00~25관람)~주차장(15:45)

3.산행시간 :  10시50분 ~  15시45분(총 4시 45분간: 중식,휴식 & 사진촬영시간포함)

4.산행인원 : 둘이서-KJ

5.산행지도

6. 모악산 793.5m

  • 천년 고도인 전주시 남쪽에 솟은 모악산(793.5m)은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일원에 위치하여 김제시 금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명산이다.
    금산사, 귀신사, 수왕사, 대원사 등을 품은 모악산은 높이 793.5m로 김제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아있어 호남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호남 4경의 하나로 경관이 빼어나고 국보와 보물등 문화재가 많다.  특히 이곳에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세워지고 10여 점의 각종 주요문화재를 갖고 있는 금산사가 자리하고 있어, 찬란한 불교예술을 살펴 볼 수 있다.
      
    모악산을 넘으면 동남쪽 중턱에 대원사, 수왕사 등 사찰이 있고 서쪽으로 귀신사가 있으며, 금산사 입구 금평저수지는 낚시터로도 적당하다.  특히 모악산은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여겨져 증산교의 본부와 더불어 30-40년대 각종 신흥종교 집단지로도 관심을 끌어 기록에 의하면 모악산 기슭에는 대원사, 귀신사, 수왕사등 사찰을 비롯 무려 8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금산사와 벚꽃은 변산반도의 녹음, 내장사와 단풍, 백양사의 설경과 더불어 호남의 4경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코스는 금산사를 벗어나 심원암 뒤쪽의 능선을 따라 오른다. 봄철이면 정상까지 진달래가 만발해 꽃구경을 하면서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는 김제평야와 만경강이 시야에 들어오고 전주시와 운장산도 보인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에 이르기까지 벚꽃터널도 장관이다. 

  • 인기명산 100  65위 (한국의산하 1년간 접속통계에 의한 순위)

    o 이른 봄 3~4월, 가을산행순으로 인기가 높다.

    산림청 선정 100 명산 선정사유
    o
    진달래와 철쭉이 유명한 호남 4경의 하나이며, 도립공원으로 지정(1971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o 신라 말에 견훤이 이 곳을 근거로 후백제를 일으켰다고 전해짐.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대적광전(보물 제467호)·혜덕왕사응탑비(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7호)등 많은 문화재가 있는 금산사(金山寺)가 있음. 특히 미륵전에 있는 높이 11.82m나 되는 미륵불이 유명

    7. 산행사진

     

     

     

     

     

     

     

     

    대원사-『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조에는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이 고구려에서 백제의 완산주 고대산으로 내려온 이야기와 더불어 그의 제자 11명과 그들이 세운 절의 이름이 나온다. 그 중 대원사(大原寺)는 보덕(普德)의 제자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함께 세운 절로, 전라북도 전주시 서남쪽 30리 되는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사찰이다.(강인구 외, 2002)

    대원사를 창건한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에 대한 사적(事蹟)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자 가운데 명덕(明德)을 제외한 다른 10명의 제자들은 고구려의 영탑사(靈塔寺) 창건 당시부터 활동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노용필, 1989) 특별히 제자로서 언급되는 이들 승려들은 보덕과 활동을 같이 하며 그 사상적인 완성을 이루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김주성, 2003)

    이후 대원사는 고려 문종 20년(1066)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嚴)이 중창하였는데, 이때를 창건시기로 보기도 한다. 현재 대원사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원통보전·응향각·삼성각·봉익루·범종각·구요사·객실 등이 있다. 부도는 모두 9기가 있었다고 하나 대웅전 남쪽 아래에 있던 3기는 소재가 불분명하다. 남아 있는 6기의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유물은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각(龍刻) 부도이다. 옥개석 가운데에 두 마리의 용이 뒤엉켜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7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대웅전 안에 있는 목각사자상은 1606년 이 절을 중창한 일옥(一玉)이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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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왕사

    전북 완주군 모악산 정상에 이르는 길목에 수왕사가 있다. 커다란 암벽을 뒤로 하고 토담으로 엉성하게 지어진 수왕사는 물이 좋다. 무량(無量)을 한자로 옮겨 수왕이 됐듯이 이곳의 물은 끝이 없으며 물 중에서 으뜸으로 친다.
    수왕사의 주지 벽암(碧巖)스님에게 부탁해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의 왕’을 봤다. 찬기운이 나는 석간수(石間水) 주변에 희귀한 개구리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수왕사의 물은 좋은 물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무거우면서도 상쾌한 물맛은 대지와 태양의 정기가 섞이는 새벽기운과 함께 몸으로 빨려든다.
    물맛을 물맛으로만 남겨둘 손가. 정유재란으로 불탄 수왕사를 중창한 진묵대사(1562∼1663)는 이 석간수로 곡차를 빚어 마시기 시작했다. 약수가 흘러나오는 암벽 위 참선하기 알맞은 공간이 있어 이곳에 머물렀다지만 진묵대사는 곡차 빚는 재미에 수왕사에 머물렀을지 모른
    다. 이렇게 진묵대사를 시작으로 수왕사에 전해 내려오는 술이 송화백일주와 송죽오곡주다.

     

     

     

     

     

    무제봉에서 본 구이저수지

    모악산 정상

     

     

     

     

     

     

     

     

     

     

     

     

     

     

     

     

     

     

     

     

     

     

     

     

     

     

     

     

     

     

     

     

     

     

     

     

     

     

     

     

     

     

     

     

     

     

     

     

     

     

     

     

     

     

    금산사 [金山寺]_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露柱)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잡고 있다

     

    금산사미륵전_금산사 경내에 있는 3층 규모의 불전. 국보 제62호. 미륵전 은 신라 법상종시대에 미륵본존(彌勒本尊)을 봉안한 불전으로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金堂)이다. 초창(初創)된 시기나 당시의 건물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표율사가 중창시에 미륵장육불상(彌勒丈六佛像)을 조성해 3층전인 금당에 봉안했음이 〈삼국유사〉와 〈5층석탑중수기〉(1971년 발견)를 비롯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1705년)·〈금산사지 金山寺誌〉(1921년) 등에 기재되어 있다. 또 현재도 소조불상(塑造佛像)의 대좌 아래에 커다란 철제 수미좌(須彌座)가 남아 있어 과거의 장육상대좌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불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된 후 1627년(인조 5) 소조삼존상을 조성하였다. 현건물은 1601년부터 1635년 사이에 수문에 의해 재건된 뒤 4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79평,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50평,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약 28평 가량 된다. 건물은 총높이가 20m 가량 되는 3층인데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당초부터 계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구방식(架構方式)은 1층에 고주(高柱) 4개와 20개의 변주(邊柱)를 세워 이들 사이에는 굵직한 퇴보를 걸고, 그위에 2층 변주를 세우고 이를 다시 고주와 퇴보로 결구하였다. 3층은 고주가 그대로 우주(隅柱)가 되고 그위에 지붕을 올렸다. 이와 같은 가구방식은 문루(門樓)나 목조탑파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으로 외부첨차는 쇠서[牛舌], 내부는 운궁(雲宮)을 기본으로 여러 차례 중수됨에 따라 초가지형태나 공포짜임새에 변화된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1층에서는 평방(平枋) 위에 공포를 올렸으나 2층 이상에는 창방(昌枋) 위에 바로 공포를 배열했다.

    금산사오층석탑_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25호. 높이 7.2m. 이 탑은 금산사 경내의 뒷편 송대(松臺)라는 언덕에 있는데 불사리(佛舍利)가 봉안된 사리계단(戒壇) 남쪽에 있다. 이러한 탑과 계단의 배치방식은 경기도 개성시 근교 불일사(佛日寺)에서도 볼 수 있고,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 앞에 대웅전을 건립하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과도 유사한 것으로 사리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놓인 5층의 방형석탑이다. 갑석(甲石)과 그 위에 얹힌 1단의 괴임은 판석을 여러 개 짜맞춘 형식이며 탑신부 1층까지 여러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옥개석은 두꺼운 편이며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줄어 추녀 밑이 넓어졌는데, 중앙에서 모서리를 향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점이 특이하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넓고 경사는 급한 편이다. 탑 전체를 볼 때 2층 이상부터 체감비율이 적은 편이나 1층 옥개가 넓어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는 5층 옥개석 위의 노반(露盤)에 갑석형이 넓게 얹혀 있고 신부(身部)에 우주까지 새겨져 있어 6층으로 보기 쉽다. 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가 얹혀 있는 상륜부의 모습은 라마 탑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특이하다.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작아지고, 상하층 기단의 갑석 위에 판석을 삽입하여 굄으로 삼은 점, 옥개석 추녀 밑선이 곡선으로 된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금산사는 후백제 견훤과 관련된 전설이 있으나 그보다는 늦은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탑을 1971년 해체·복원할 때 사리구와 묵서의 탑지가 발견되어 1492년(성종 23)에 중창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뒤돌아 본 모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