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여행/2013 산행 & 여행

130217 고위산(남산:경주)

만사형통 33 2013. 2. 27. 21:43

1.산행일자 : 2013. 2. 17(일요일)

2.산행코스 :  용장1리(9:25) →천우사 →이무기능선→헬기장(시산제11:00~12:05)→고위산→백운재

             →봉화대→마애보살반가상→칠불암(13:00~12) →남산마을→통일전주차장(2:20)

3.산행시간 :  09시25분 ~ 14시20분 (4시55분간: 중식,휴식 & 사진촬영시간포함)

4.산행인원 : 응서랑-가원

5.산행지도 

 

6. 고위산 495m(남산 : 경주)

 경주 남산은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신성시 되어왔던 곳이다. 수많은 전설과 역사 유적들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불교 관련 유적 뿐만 아니라 왕릉, 무덤, 궁궐터들이 남아있어 신라 문화의 집결체라고도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남산에서 나라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까닭에 남산에 얽힌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헌강왕에게 신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멸망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경주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 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 등이 있는데, 다양한 문화재가 곳곳에 산재해 있어 신라문화가 이곳에 집결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남산 일원의 수많은 불교 유물들을 중심으로 한 유적이다. 6세기초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로 경주남산에는 많은 절과 탑이 세워지고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김시습이 거처하면서 금오신화를 지었다는 용장사터 뿐만 아니라, 신라의 종막을 내린 포석정을 비롯해 수많은 불교 관련 유적, 왕릉, 무덤, 궁궐터들이 남아 있다. 남산의 40여 계곡 중 절터가 없는 계곡은 거의 없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 불상은 80체이다. 보통 평지에 있는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산의 절에는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탑을 세워 마치 하늘 높이 솟은 것처럼 솟아 보인다. 남산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이 51체이다. 특히 마애불상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불교 수입 이전부터 믿어온 암석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결과이다. 우리에게는 오랜 옛날부터 바위신앙이 있었는데,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바위 속에 영검이 있다고 믿어온 신라사람들은 바위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게 되어 많은 마애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경주남산은 지난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인기명산 100  88위 (한국의산하 1년간 접속통계에 의한 순위)

    o 11~12월, 봄 산행순으로 인기가 높다.

    산림청 선정 100 명산 선정사유
    o
    길이 약 8km, 폭 약 4㎞의 산줄기안에 불상 80여체, 탑 60여기, 절터 110여 개소가 산재하여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등 신라시대 역사 유물·유적의 보고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o `경주남산불적지'로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칠불암마애석불 등이 유명. 동쪽에는 남산산성 등이 있음

  • 7.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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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동 칠불암 뒤로 높이 솟은 암벽에는 신선암 마애(磨崖) 보살 (菩薩) 반가상(半跏像)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바위를 얕게 파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보살상을 모셨는데,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도톰하게 새긴 고부조(高浮彫)이다. 반가상 앞으로는 아찔한 절벽이 자리 잡고 있어 여유로운 보살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 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표현이 섬세하고, 양감이 두드러지는 것이 통일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높이는 1.9m이다. 보물 제199호이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칠불암

     

     

    신라의 유적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경주 남산은 신라인들의 불국토 신앙이 꽃을 피운 지역이다. 이곳 남산은 그 자체가 사찰이며 신앙의 대상이라 할만큼 불교 관련 유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남산 봉화골 바위 면에 3존불과 4면불로 조각된 칠불암 마애불은 예술적, 종교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칠불암(七佛庵) 마애석불(磨崖 佛)이라는 이름은 자연 암반에 새긴 3존불과 그 앞의 모난 돌 4면에 조각된 4면불을 합쳐 부른 것에서 기인한다. 또한 근래에 7불이 있는 이곳에 암자를 지어 칠불암이라 칭하기도 한다. 자연석을 이용한 불단의 돌 축대는 바위에 새겨져 있는 불상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7불 왼쪽에는 석등과 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들을 모아 세운 탑이 있어 자연 가람을 이루고 있다. 원만한 표정에 위엄 있는 얼굴,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 신체 표현, 협시 보살들의 유연한 자세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마애석불은 석굴암 본존과 그 조성 시기가 같은 8세기 중엽의 통일 신라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까닭에 천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원형에 가깝도록 잘 보존되어 왔다. 오늘날까지 칠불암 마애석불에는 그 영험을 믿고 소원을 비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물 제200호이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남산동 동ㆍ서 삼층석탑 보물 제124호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 동·서 두 탑은 각각 양식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흔치않은 모습이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마주 서있다.

     

    경주 남산에 위치한 서출지(書出池)는 삼국 시대에 조성된 연못으로, 연못 뒷 편의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와 함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히 서출지는 사금갑(射琴匣) 설화를 간직한 곳인데, 그 내용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남산 기슭의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라고 하였다. 왕은 신하로 하여금 그 뒤를 쫓게 했으나 신하는 연못 가에 이르러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때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 서찰이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신하는 이를 임금께 올렸는데 겉봉에는 "이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여져 있었다. 두 사람이 죽는다는 말에 왕은 봉투를 개봉하려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신하의 진언에 의해 봉투를 개봉하였다. 봉투에는 '금갑(琴匣)을 쏘라'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궁으로 돌아와 금갑을 향해 화살을 당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중과 궁녀가 몰래 간통하고 있었고 이들은 왕을 살해할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사형에 처해졌으며, 연못에서 서찰이 나왔다 하여 이후 못의 이름을 서출지라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정월 보름에는 까마귀에게 제사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의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서출지는 연꽃이 만발할 때와 못 가에 우거진 배롱 나무가 꽃을 피울 때의 모습이 특히 장관을 이루어 경주 부근에서도 보기 드문 경승지로 손꼽히고 있다. 사적 제138호이다.